카이퍼 박사는 19세기 화란이 낳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다. 아마 그가 영어권이나 불어권 나라에 태어났다면, 그의 명성과 사상은 훨씬 더 한국에 잘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이 조국 화란은 조그만 나라였고, 강대국인 영국, 독일, 불란서 사이에 끼어서 상대적으로 약소국가인데다가 제한되 화란어 사용으로 해외에서는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920년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가 서거했을 때 전 세계 120여개 신문들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서거를 애도하고 제2의 칼빈이 잠들었다고 논평했으며, 그가 일생동안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왕권을 위해서(Pro Rege) 일했던 위대한 신학자요, 교회개혁자요, 정치가요, 언론인이었음을 격찬하였다.
카이퍼는 1837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라이덴 대학에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25세 나이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6세에 목사가 되어 우트레흐트와 암스텔담의 큰 교회의 담임목사로 일하였다. 카이퍼는 너무나도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에 그와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카이퍼를 가리켜 「열개의 머리와 백개의 손을 가진 인물」이라고 격찬했다.
그는 이 세상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168cm의 작달만한 키에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모든 분야에서 혼신의 힘을 쏟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
카이퍼는 불을 튀기는 대설교가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의 노선에 선 국교에서 교회를 개혁하여 화란 개혁 교회를 세운 교회행정가였다. 카이퍼는 불란서 혁명이 인본주의 사상에서 이루어진 것을 공격하고, 그의 스승인 흐른 봔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ceterer)의 뒤를 이어 A. R. P. 정당의 당총재가 되었다. 그는 하원 의원과 종신 상원 의원을 지냈으며 수상으로서 재직하면서 칼빈주의적 정치를 실현하였다.
카이퍼는 인본주의적이고 무신론적 학문운동의 국립 대학에 대항해서 성경적이고 신본주의적인 칼빈주의 사상을 가진 뿌라야 대학을 설립하고 조직신학교수 및 총장에 취임하였다.
1880년 뿌라야 대학을 개교하면서 영역주권(領域主權, Souvereiniteit in eigen King) 사상을 제창함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얻은 후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위해 살아야 하며 그의 말씀 앞에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189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가서 그 유명한 「칼빈주의」란 특별강연을 함으로 갈채를 받았고 미국 장로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간지인 「스탠다드」지를 창간하여 편집인이 되었고 주간지 「헤라우트」지를 창간하여 45년간 편집장으로 일하였다. 카이퍼의 생애는 50여년간을 기독교 언론인으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다. 카이퍼는 1862년부터 그의 서거때까지 한 평생을 저술가로서 일하면서 223권의 크고 작은 책을 저술하였다. 그 중에는 신학, 정치, 사회, 문화, 예술, 과학, 교육 등 손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카이퍼의 생각은 복음이 인간의 전 생활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능동적인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의 삶이 그의 구체적인 삶속에서 명백히 나타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우리의 삶 전체를 드려야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제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은 지 100년이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1천만 명의 기독교인들을 헤아리게 됐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삶이 부족한 이때,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삶의 원리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