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탄생 500주년!
금년이 하필 칼빈 탄생 500주년이 아니라고 해도, 종교 개혁자 칼빈의 사상과 삶은 오늘처럼 방향키를 잃고 방황하는 교회들에게 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을 확신한다.
칼빈은 실제로는 종교 개혁의 제2세대로서, 기왕에 있었던 종교 개혁자들 예컨대 루터와 쯔빙글리 등의 사상과 그의 동료들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완벽하게 정리해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교회역사학자 필립 샵(Phillip Schaff)은 말하기를 “루터는 단단한 바위산을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킨 사람이라면 칼빈은 루터가 깬 바위에 글자를 새긴 사람이다”고 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다. 칼빈은 지난 천년기에 있어서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16세기 교회의 어두움 가운데서 하나님은 루터와 칼빈을 사용해서 교회를 교회되게, 말씀을 말씀되게 하였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이었다.
그런데 칼빈은 개인적으로 참으로 병약하고 고독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특별히 부름 받은 겸손한 종이었다. 우선 그는 하나님께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소명을 가졌을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을 해석할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유럽의 고급 언어인 라틴어를 모국어였던 불어보다 더 자유스럽게 구사할 줄 아는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씀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요 경건의 사람이었다. 또한 법학도로서 쌓은 논리적 사고와 당대의 유행하던 수사학적인 말과 글 솜씨 등이 뛰어났기 때문에 위대한 종교 개혁자요, 교의 신학자요, 성경 주석가이며 목회자요, 강해 설교자로서 사명을 능히 감당하도록 하였다. 그래서인가 1536년 그는 27세의 나이로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 이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오로지 성경으로만 해설한 위대한 작품이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핵심이었다. 그는 이 「기독교 강요」를 수정 보완하여 1559년에 오늘 우리가 읽는 완성된 작품을 만들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출판이 된지 금년 473년이 흘렀지만 여기에 대한 가톨릭의 대답이 없다는 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너무나 성경적인 하나님 중심의 경건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이 쓴 「기독교 강요」 초판본 속표지에는 이 책이 <경건의 대전>이라고 했다.
우리가 칼빈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일차 자료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두말할 필요 없이 「기독교 강요」이다. 칼빈은 계시록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성경을 주석했다. 이 주석은 목양의 현장을 생각하고 목사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는 그의 「설교집」이다. 칼빈은 강해 설교의 왕이다. 특히 그는 연속 강해 설교의 대가였다. 칼빈의 종교개혁은 강단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는 제네바에서 전후27년 가까이 말씀의 종으로 살았다. 그는 1주일에 6,7회의 설교를 하면서 영적으로 굶주린 자들에게 복음으로 새 생명을 주었다. 넷째는 그의 「편지」이다. 칼빈은 설교 사역과 교수로 가르치는 일과 교회개혁 활동 그 바쁜 틈에도 교회의 지도자들과 국왕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줄기차게 편지를 써서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알리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변증했다. 다섯째는 칼빈의 「신학 논문」이다. 칼빈은 신학 논쟁이 있을 때마다 논문을 써서 발표했고 그것은 다시 책으로 만들어 졌다. 사실 16세기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제대로 접하지 않고는 신학을 공부했다 할 수 없고 칼빈의 성경 주석과 설교집을 읽지 않고는 개혁주의적 목회를 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칼빈은 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삶의 모든 영역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칼빈의 작품을 잘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성경적 세계관을 세우는데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현대 사상과 세계의 구조 즉 자유민주주의 체계와 경제 시스템은 칼빈의 영향 때문이며 서구 역사의 정신적 기조를 결국 칼빈에게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칼빈을 모르면 민주주의를 바로 안다고 할 수 없고, 칼빈을 모르면 서구 문화의 기틀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칼빈 탄생 500주년의 의미는 단지 교회나 신학의 과제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미친다고 하겠다. 칼빈의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영국의 퓨리탄, 스코틀랜드의 요한 닉스를 중심으로 한 장로교회, 불란서 휴그노파, 화란의 개혁교회, 특히 19세기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축이된 칼빈주의 부흥운동은 영국의 퓨리탄 운동과 함께 미국 사회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칼빈은 일생동안 교회의 개혁자였지만 그는 또한 진실한 목회자요 대 강해설교자였다. 그런데 그것 못지않게 크게 사역한 것은 1559년에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였다. 그는 이 대학을 세우면서 기도하기를 “이 학교가 경건과 학문이 있는 대학이 되게”해 달라고 했다. 그의 꿈은 이루어져서 유럽 각국의 교회개혁의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첫해는 161면이 공부하러 오더니 10년 후에는 그 열배인 1600명의 학생들이 몰려 왔다. 여기서 배출한 인물들이 졸업하고 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교회의 개혁을 이루었다. 교육의 성과는 그렇게 컸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게르만 민족에게만 영향을 끼쳤으나 칼빈의 사상은 전 유럽,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제네바 아카데미」는 신학의 센터일 뿐 아니라 선교의 센터이기도 했다.
교육을 통해서 인물을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칼빈은 종교 개혁자로서 그것을 진작부터 깨달았다. 유럽 각국에서 제네바 아카데미로 몰려온 청년들은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하고 경건한 훈련을 받고 모두 개혁주의자들이 되어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울시누스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만들었고, 요한네스 보겔만은 톨트총회의장이 되고 여기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만들었다. 스코틀랜드에 돌아온 요한 낙스는 피의 여왕 메리를 공격하고 장로교회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제네바 아카데미는 종교 개혁의 진원지이기도 했다.